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욘 라베 (문단 편집) === 난징 대학살 === 그러나 급속도로 [[중일전쟁]]의 전황이 격화되고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난징에 접근해 오며 폭격을 퍼붓는다. 이에 여러 서양인들이 도시를 떠나지만 몇몇 선교사 등 외국인들은 도시에 남는 쪽을 선택했다. 1937년 12월, 난징을 일본군이 점령하자 라베는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 난징 안전구역을 만들고[* 같은 해 11월 [[상하이]]에서 45만 명의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안전지대에서 그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https://skeptoid.com/episodes/4480|#]] ][* 이 중에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 1883~1979)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에 협력했던 숨겨진 의인이었다. 업적만 해도 주중 미국대사와 [[여운형]]의 만남을 성사시킨 일, [[윤봉길 의거]] 직전에 [[윤봉길]]을 직접 자신의 차에 태워 의거 장소까지 데려다 준 일, 그후 [[일본 제국|일제]]의 체포를 피해 [[김구]] 등을 자택에 숨겨주었다가 [[상하이시]]에서 탈출시켜 준 일, [[안창호]]가 체포될 때 이를 항의하는 서한을 보낸 일, [[한국광복군]]과 [[미국 전략사무국|OSS]]의 협력을 성사시킨 일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직접 한국에 와서 구호활동에 전념하다가 [[1951년]]에 은퇴하고 미국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 관리를 맡은 중립위원회를 구성해 일본군의 천인공노할 약탈과 살육, 강간으로부터 중국인을 지켰다. 이 과정에서 중국 정부에 연락해 협약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중국군 패잔병을 재빨리 대피시키기도 했으며, 27년간 모은 사재를 털어 난민들을 도왔다. 훗날 그 이유를 본인의 일기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그것은) 인륜의 문제였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함부로 배반할 수 없었고, 그렇게 신뢰받는 존재가 된다는 건 매우 감동적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안전구역은 난징 대학교와 대사관에 위치해 있었으나, 울타리나 철조망도 없이 오로지 '도로'를 경계로 국제위원회와 일본군간의 구두 약속으로 성립한 것이었고 군사력 또한 전무해 들락날락하는 일본군을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것을 몸으로 막은 외국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희생자가 얼마나 늘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강간, 살육을 벌이고 있던 일본군이 밀고 들어오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지만 욘 라베가 우호국인 독일의 [[나치스]] 당원이었다는 점 덕에 적어도 늦출 수는 있었고 그 동안 수십만명이 무사히 도시를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숫자는 약 15~25만 정도로 추산된다. 참고로 난징 대학살 사망자가 대략 20~30만 명이란 것을 감안하면, 욘 라베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삽질이긴 했지만 욘 라베는 나치당원이었기 때문에 "관대하신 히틀러 총통 각하께서 미친 일본군들을 막고 저 불쌍한 중국인들을 인도적으로 구해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편지까지 썼다. 이는 독일이 [[추축국|추축동맹]] 성립 이전까지는 중국 국민혁명군에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이라는 군사고문을 파견하고 무기와 장비를 지원하는 등 친중적인 태도를 취했었기 때문에 아무리 추축동맹 성립으로 독일이 일본 편이 되었다 해도 독일이 중국에게는 아직 우호적일 것이라 마지막 희망이라도 걸어볼려는 생각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일기의 히틀러 찬양 부분 및 나치당원이라는 점 때문에 발굴이 늦어지고 저평가되었다는 지적이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